차가운 겨울, 크리스마스이브 날, 시내의 거리는 저녁노을이 진 잿빛 하늘에서 첫눈이 내린다고 벌써부터 떠들썩해졌다


형형색색의 네온사인들이 거리를 밝게 비추고, 산타복을 입은 알바생 들이 징글벨, 징글벨, 노래를 부르며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건넨 전단지를 받아들고, 인사성도 참 바르지, 꾸벅 인사 후 '수고하세요'라며 그들을 지나쳤다

그때 내 어깨위로 옹송그린 하얀 게 내려앉았다.


눈 이였다


눈이 내리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었다. 눈앞을 가득 매운 네온사인들 사이에서도 그 추억만큼은 따뜻한 봄날의 새싹처럼 피어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련한 추억이다

그때 했던 행동들이 바보같아 보이기도 하고, 용기 있어 보이기도 했다. 바보라서 용감하다는 말이 있듯, 그때 난 '바보'였던 것 같다.

벌써 2년이 지난 일이지만 지금까지 눈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봄의 발자취 같은 것이다.


나는 철없는 중학생 이였다

공부도 안하고, 부모님 속만 썩이면서, 또 게임은 얼마나 좋아하는지

비록 그런 나도 수학이나 과학 같은 것은 아니지만,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부모님이 공부를 하라며 화를 내셨던 때도 아니었고, 누군가 공부를 하라고 했던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한 사람 때문이었다.

 

이렇게 장황하게 표현해서 그렇지, 사실 그 사람은 그렇게 예쁜 것도 아니고, 몸매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성격이라도 순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성격조차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문제지-



그녀와 처음 만난 것은 내가 다니던 예체능 학원에서였다

첫인상은 강력했다. 째려 보는듯한 날카로운 눈매와 다른 동급생 여자들보다 큰 키는 특별하게 보일 정도다


첫인상만큼이나, 그녀와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

사람을 멀리하는 것은 아닌지 주변에는 항상 친구가 많았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다정다감한 목소리나, 친한 사람에게는 끝도없이 친절한 그녀의 성격 덕분인 것 같았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그녀와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친절했고, 사람 좋은 미소로 그들을 반겨주었다

나도 친해지고 싶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와 친해지면 서로 대화도 하고, 장난도 칠 수 있었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과 ''라는 벽이 그녀에게 가는 길을 막아섰다.

별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지만 잡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이었다.


나를 제외하곤 대부분 그녀와 친하거나,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 주제도 그녀로 맞추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대화엔 내가 낄 틈이 없어보였다


그리고 가끔 내가 혼자 이야기에 끼지 못하고 있을 때면, 한 친구가 다가와 우스갯소리로- 'ㅁㅁ이는 착해서 친해지기 쉬울 거야'라며 귓속말을 해주곤 했다.


말은 쉬웠다. 내성적인 성격은 용기라는 장작에 불이 붙지 못하도록 물을 붙는 것과 같았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면 항상 '난 별로-'라며 애써 아닌척했다.


그것이 최선이 아닌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는 자신을 말릴 수 없었다.


내가 다니던 학원은 미술학원 이였다. 미술에 큰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 모를 재능을 찾기 위해 다니던 것 이였다

그리고 음악학원이나 체육학원 처럼 미술학원도 대회에 나간다

콩쿨처럼 분위기 잡고하거나, 전국체전처럼 신나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하는 대회라 상만 탄다면 예고 진학과 진로 결정에 도움이 되는 대회였다.


우리 학원도 학생들을 대회에 내보내 상을 타오게하기 위해서 매일을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번 대회 주제는 수채화였다

나무와 초원을 그리던 것이 아직 머릿속 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대회까지는 대략 3달이 남아있는 상황이라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 홀로 선생님이 그리는 것을 보고 따라 그리거나, 자신만이 생각해낸 것을 그리는 것이 매일의 수채화 주제였다


나는 물론 선생님의 그림을 따라서 그렷다

나무와 드넓은 초원, 그리고 추가로 물을 마시는 사슴을 그리자 평화로운 느낌이 났다

나는 원래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의 그림을 그릴 때면 저도 모르게 뿌듯한 미소를 짓곤 했다. 그림에 만족감을 느끼고, 잘 그려지면 행복해 하는게 좋은 점이라면 좋은 점일 것이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녀는 무엇을 그리고 있난 궁금해졌다

서로 맞은 편 이라서, 그녀의 그림은 고개만 뒤로 돌리면 바로 확인 할 수 있는 자리였다

조용한 교실 속, 나는 붓을 잠깐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올곧은 자세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깔끔한 스케치, 조화로운 색 조합, 모두 그녀의 특기였다

그것을 이용해서 그린 그림은 엄청나다는 표현이 정말 잘 들어맞았다


그녀의 그림 속에는 토끼가 있었다

새하얀 털이 소복한 토끼

그 토끼의 손에는 선홍빛의 꽃이 쥐어져 있었다

생동감 넘쳤다

금 과장될 수도 있지만, 뒤 배경을 그리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그림 속 토끼는 벌써부터 새하얀 구름 위를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그림에 집중했다. 토끼의 털은 신중을 기울인듯 모두 제각기 방향으로 서있었고,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대단했다.

그렇게 그림을 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순간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빨게지고, 부끄러운탓에 고개를 숙여버렸다. 

날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혹시 변태로 보는 건 아닐까? 

이런 저런 고민으로 내 3시간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모든 수업이 끝났다

나는 그녀와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마저 그림을 그리고 나서 장비를 정리했다

그런데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순진함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오감을 자극하고,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져갔다.

쳐다봤던 것 때문에 온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

어쩌면 다른 이유 일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내게 와주었단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두근거렸다. 얼굴이 빨게지면서 창피함에 눈물이 나오려고 까지했다. 

하지만.


기대하지말걸-

한 친구 녀석이 가방을 매고 날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날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 너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가냐? 감기 걸린 거냐?"

, 걱정은 고마웠지만 솔직한 심정은 실망스러웠다

하긴, 친하지도 않은데 선뜻 다가올 리 없지. 그러고 보면, 그녀와 친해진 친구들은 모두 먼저 그녀에게 다가갔다

먼저 용기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허무하면서도 부끄러운, 그런 하루를 어이없게 보내버렸다.

 


대회기간엔 선생님이 모든 학생들을 봐주기가 힘들다

그래서 잘하는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못하는 학생들을 전담 마크해서 가르쳐주었다. 나는 못하는 쪽에 속해있었다. 당연하게도, 자랑은 아니지만, 저번 대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도움을 받는 쪽이었다

지난 대회는 만화그리기였다

그래서 선이 부드럽거나 강렬하게 보이는 법과 자연스러운 명암, 액션씬 까지 간신히 다 배웠다

그렇게 한 후에 그림을 그렸지만, 너무 짧은 기간이라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오지 못했다


이번에도 다른 주제라서 또 배워야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싫었다, 잘 그리지도 못하니까 답답했다

그래서 이번 대회 안에 상을 받지 못한다면 학원을 나설 생각이었다.

선생님은 이번에도 대회 준비를 위한 짝을 정해주셧다

짝은 남남, 여여로 서로 불편하지 않게 그림을 배우기 위해서 항상 그렇게 짝을 지어 주셨다

나이는 상관없었다

오히려 상급생에게 배운다면 이득이 컸다.


"ㅁㅁ, ㅇㅇ랑 같이하자"


그 아이의 이름이 호명되고, 그 후 내 이름이 호명됐다

의아했다.

남녀가 한 짝이라니, 생각해보니 이번 대회가 시작 되고나서 남녀 한 쌍이 학원을 나갔다

지금이라면 그녀와 친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와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인사 한 번, 이름 한 번 불러본 적이 없었다.

오늘 그녀와 짝이 된다

처음으로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인사를 한다

나는 운명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짝이 전부 정해진 뒤 나와 그녀는 간단한 인사 후 연습에 들어갔다.

그녀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그녀의 붓을 따라한다

최대한 똑같이 그녀가 하는 대로 손목과 팔을 움직였다

그녀의 붓이 하늘을 그리면 나도 하늘을 그린다

그녀의 붓이 나무를 그리면 나 또한 나무를 그렸다

이것은 그녀의 세상 이였다

그녀가 상상하고, 손과 붓을 움직여 만들어낸 그녀만의 공간, 따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내 세상이 아니었다

결국 대회에서 나 홀로, 그녀의 도움 없이, 그려내야 하는 것은 나만의 공간 이였다.

그녀는 자신의 세상을 보여주며, 내게 나만의 세상을 보여 달라 말한다.


", 이제 한 번 생각했던 걸 그려봐요."


그녀는 밝은 미소를 곁들여 말했다

그 달콤한 향신료에 얼굴이 붉게 물들고, 붓을 잡은 손이 떨렸다

괜스레 떨림을 숨기려 손에 힘을 주었지만 역효과만 날 뿐 이였다

붓을 든 손이 떨려서 수전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것을 보고 내게 한 마디 한다.


"떨지 말고,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천천히 해요."


부끄러웠지만, 그녀의 말에 힘입어 떨리는 손을 조금 진정시키고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래도 어려웠다

떨리는 손에 물감은 번지기만 하고, 그것을 덧칠하고, 다시 그리고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내 손은 자괴감으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최악이다

치심과 부끄러움이 남자로써의 자존심을 뭉개 버렸다.


젠장, 그렇게 반복하다가 3시간이라는 그녀의 귀중한 수업시간이 날아가버렸다.

하아, 한숨을 쉬며 짐을 정리한 후, 나는 집으로 가는 신호등 앞에 서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뒤로 돌아 섰다

또 그 녀석이겠지, 하지만 뒤 돌아본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초코우유를 내밀고 있는 그녀의 모습 이였다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녀는 내게 초코우유를 밀어 넣듯 손에 쥐어주었다.


 "잘 부탁해요! 어려운거 있음 문자줘요!"


그 후 그녀는 뒤로 돌아 도망치듯 학원 건물 안쪽으로 뛰어갔다

그녀가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초코우유를 뒤집어보았다. 노란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있었다

그곳엔 그녀의 전화번호와 그녀가 방금하고 갔던 말들이 느낌표 하나 틀리지 않고 적혀있었다

아마 이때부터 초코우유를 좋아했던 것 같다.


이후, 집에 도착한 나는 그녀가 준 번호로 문자를 보내려고 했지만 보내진 못했다. 뭐랄까, 긴장되고, 맞춤법이라도 틀릴까 두려웠다

그래서 문자를 보내지 못했다

대신 학원에서 질문하고 배웠다

독학도 했다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상을 타서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시간은 흘러, 어린 단풍에 저녁노을이 스며드는 가을이 왔다.

 

이제 대회까지 한 달 남짓밖에 시간이 남지 않아서 도움 없이 홀로 연습에 매진해야 했다


한 달 동안은 그림 그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독학도 철저하게 했고 모르는 게 있거나 잘 못하겠으면 개인적으로 그녀가 아닌 선생님께 물어보러갔다

그녀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우선 이였다.

대회까지 일주일 정도 남았을 때, 그녀가 내게 먼저 다가왔다.

당연히 나는 잘 그리고 있었다

가르쳐 준대로 열심히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글을 하나 쓰고 있었다.

맞춤법 공부도 할 겸, 겸사겸사 소설을 썼다

출판 같은걸 목표로 쓰는 건 아니 여서 내용은 재미없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그곳엔 그녀에게 보이면 안되는 것도 그려져 있었다. 

집에 가면 그녀가 하라는 수채화는 그리지 않고, 대회까지 많이 남아서, 매일 같이 연습했던 그림. 

아직은 흑연으로 스케치만 했지만 대회가 끝나고 여유있게 색을 입힌다면 정말 아름다울 것만 같은 그림이다. 


그걸 들키기 싫었지만, 그녀는 나보다 먼저 이게 뭐에요? 라며 옆에 모르고 펼쳐놓은 공책을 그대로 들어서 눈앞으로 가져갔다

그림 그리는 곳에 글이 빼곡히 적힌 것이 있어서 궁금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거기엔 내가 써놓은 글이 적혀져 있었다

맞춤법 공부하는 중이라서 지금 와서 보면 틀린 것도 많고, 내용의 허점도 굉장히 많았다

그것을 그녀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나는 바로 붓을 놓고 공책을 잡아챘다.


", 안돼."

"칫, 왜요? 혹시 중2병스러운 주문을 적고 있다든가..?“


나는 그녀에게서 공책을 빼앗듯이 집어 들고는, 접어서 가방 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니거든. 너 준비는 다 했어?"

"당연하죠~ , 맞다. 지금은 이것 땜에 온 게 아니에요. 이거 들어봐요. 이거.“


그녀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내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대회까지 일주일정도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녀는 여유로워 보였다

그녀는 이어폰이 없다는 이유로 학원의 쉬는 시간에 스피커를 켜서 노래를 하나 들려주었다

박효신의 야생화였다

들으면 머리 속에 가사의 장면이 그려져서 그림을 연습할 때나 습작할 때 좋다고 한다

그때부터 내 노래 재생 목록에는 야생화만이 반복재생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나는 야생화를 들으며 대회 전날 마지막으로 습작 하나를 완성했다.


 

대회 날에는 주말이라 그런지 차도 많았고, 워낙에 큰 대회라서 사람도 많았다


대회의 개막식이 열리고, 시간이 지난 후 지각생을 제외한 모두가 자리에 착석하자 주제를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은 탓에 대회에서는 주제를 분야별로 나누어 주었다.

내가 받은 것은 나무였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나는 전날에 항상 연습했던 나무를 그렸다. 하지만 그것은 평소의 푸른 잎사귀가 달린 나무가 아니였다.  

겨울 눈이 내리는 밤의 배경 속에 한 그루의 앙상한 겨울 나무가 서있는 것이었다.

나는 안심했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대회에 임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습했던 것을 그렸지만 상을 받진 못했다.

따지고 보면 나와 같은 사람들은 차고 넘쳤을 것이다

단지 그것을 언제 연습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대신, 다행히도 그녀는 상을 받았다.

나를 도와주느라 바빠서 못타면 어쩌나 싶었는데 괜한 걱정 이였나 보다

그녀를 비롯해서 몇 명 더 상을 타서 그런지 학원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모두가 웃고 있을 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결정을 굳혀야 했지만 말이다.



대회 날로부터 일주일 정도 지난 후, 나는 나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학원으로 갔다

일찍 가서 그런 것인지 학원에는 원장선생님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주된 내용은 내 판단이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그러라는 것 이였다.


"그래도 이번에 그린 거 봤더니 조금 아깝더라, ."

"괜찮아요."


상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그녀가 상을 탔으면 된 것이다

나는 노력했다는 것과 하고싶은 것이 생겼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역시 나와 미술은 별로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초반부터 어렵기도 했고, 좋아하기만 했지 애초에 잘 그리지도 못했다

그나마 그녀에게 배워서 재미있게그릴 수 있었던 것 같다

가르칠 때의 그녀는 이성이 아닌 친구로 다가왔다. 

따뜻했고, 상냥했으며, 카톡도 빨랐다. 

가끔은 외톨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카톡을 빨리했다.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

그렇게 그녀를 추억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물으셨다.


"그건 그렇고, ㅁㅁ이는 도움이 됐어?“


그 말에 잠시 정신이 멍해진다

이름만 나와도 이런데. 정말 학원을 그만두고 만나지 못하면 얼마나 그리울까.

 

난 그녀로 인해서, 잘 보이기 위해, 처음으로 홀로 독학을 했고,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과할수도 있지만 나는 구원받았다고 말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내 입술이 달싹거리면서 나온 포근한 목소리는 길지 않았다. 


"잘 가르쳐 줬어요."


고쳐지지 않은 내 성격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한마디.


나는 조금 더 상담을 하다가, 교실을 둘러보다 간다고 말씀드리고 홀로 교실로 걸어갔다

교실로 들어가자 사라지지 않은 그녀의 향기가 몸속에 스며든다

언제나 그래왔다.

처음 교실에 들어오면 분명 다른 사람들의 냄새에 묻혀 느껴지지 않아야 할 그녀의 향기가 가슴을 간지렷다

다른 사람들의 냄새가 모두 사라지고 홀로 교실에 있는 듯한 그녀의 향기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 향기는 그림을 그렸다. 그녀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말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색으로 그녀의 모습을 가득 채워놓은 것처럼, 그녀의 그림은 언제나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새하얀 도화지 위에 그려지는 흑연의 선은 아름다웠으며, 완성된 작품은 그 속에 무엇이 있든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은 추억이 되어간다

나는 교실을 둘러보다가 그녀의 자리에서 멈춰 섰다

모두 그렇듯, 깨끗이 정리된 책상, 이젤은 잘 접혀져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초코우유를 그녀의 책상 위에 놓고, 열심히 노력해서 쓴 편지를 옆에 두었다

편지는 짧은 진심과 한 편의 시였다

그래봤자 지금까지 고마웠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나는 그 길 따라 학원을 나섰다.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학원 밖으로 나오니 작은 눈송이들이 아스팔트 길 위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바람이 차가웠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옷을 얇게 입고 다녔다

뚱뚱해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지 얇은 긴팔에 가디건을 걸치고, 딱 맞는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학원은 괜찮겠지만, 밖은 많이 추웠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카톡으로 들어가서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멈춰있는 대화. 내가 만약 학원을 계속 다닌다면 저 밑으로 얼마나 많은 대화가 오갈까. 나는 빈칸을 눌러 "오늘 춥네."라고 글을 치고 전송 앞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두껍게 입으라고 문자를 보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인데, 참견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이 그러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싶기도 했다. 

나는 누군가 불편해 할 말, 싫어해 할 말들은 신경 쓰여서 할 수 없었다

내성적인 성격 때문인 것도 있었다.


나는 홀드 버튼을 한 번 더 누르고 검게 변한 화면을 뒤로 한 채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싸늘한 바람을 등지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가슴은 더욱 시려오기만 한다. 

나는 그저그녀가 따뜻하게 입고 다니길 바라고 있다.



그렇게 내 짝사랑은 막을 내리는 것 같았다.

 

 

1년이 지났다.

 

나는 이번 명절에 찾아왔던 사촌 누나들에게 그녀와의 일을 말해주었다

듣자마자 웃음보가 터진 누나들은 대성통곡을 하듯 웃어대며 착각이라고 했고, 그나마 착한 누나들은 웃다가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사실 같은 생각이다

그녀는 내 착각이기도 하고, 좋은 추억으로 남기도 할 것이다.

그녀는 착했다. 나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모두에게도-

미소도, 친절도, 그저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

그날 초코우유를 준 것도, 다른 의미 없이, 잘 해보자는 것이었을 것이다.

1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떠오르고 있는 추억이 있다. 화창한 봄날의 따스함도 아니고, 여름의 뜨거운 청춘도 아니다. 가을의 차가운 바람과 겨울의 눈송이처럼 가슴 시리게 만드는 그런 추억이.

 

차가운 바람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감각이 무뎌지지 않는 한, 차가운 것을 기억하긴 싫어진다

그 추억은 나에게도, 너에게도, 이제는 지나간 가을의 차가운 바람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글을 하나 쓰고 있다

판타지, 아니, 로맨스, 아니다.

단순한 편지다

하지만 조금 긴 장편으로, 받지 못할 누군가를 위해서 쓰고 있다.

거기엔 내가 살아오면서 배운 표현들이 들어가 있고, 읽어줬으면 하는 사람을 위한 진심이 담아져있다.


넌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노력 했었다는 걸, 내가 초코우유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나는 시내를 나와 조명만 켜진 길거리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초코우유 하나를 사서 나왔다

살을 에는 듯 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가방에 초코우유를 넣고, 코트 주머니에 차가워진 두 손을 찔러 넣었다. 귀마개를 하고 올걸,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귀는 따가울 정도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서 코와 입술만 고개를 숙여 코트 속으로 간신히 숨기며 걸음을 옮겼다

나는 고개를 숙인 탓에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며 걸어야 했다. 그러자 눈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는 앙상한 나무가 보였다. 그 위에 앉은 눈꽃은 조명으로인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우우웅, 갑자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내려다보니 모르는 번호로 메시지가 왔다는 표시가 띄워져 있었다

광고인가, , 입김을 불며 떨리는 손으로 잠금을 푼 뒤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런데 그곳엔 '잘 지냈어요?'를 시작으로 너의 이름, 너의 문체가 고스란히 담긴 몇 줄의 문장이 도착해있었다

나는 그대로 조명아래에서 몸이 굳었다.

읽어보니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는 것과 번호가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얼어붙을 것만 같던 온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1년이나 지났다

그런데, , 이제 와서 보내온 것일까

아니, 그건 상관없지 않을까

나는 답장으로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는 것과 고등학교 입학한 거 축하한다는 것을 짧은 몇 줄의 문장으로 입력 후, 전송 버튼을 눌렀다

마음 한 켠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넌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니 분명 그림은 더 잘 그릴 거고, 이제 고등학생이 됐으니 화장도 해보겠지

내 기억 속 너의 모습은 언제나 화려한 빛이 났다.

항상 예뻤고, 지금도 예쁠 것이다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나는 널 좋아한다

네가 들려줬던 야생화는 아직도 듣고 있고 너로 인해 나는 지금도 초코우유를 마신다

차가운 겨울에도, 뜨거운 여름에도, 추억이란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이제 쓰고 있던 편지를 마치려고 한다.


내겐 겨울이 오면 떠오르는 추억이 하나 있다. 가슴 시려웠지만 따뜻해진, 상냥하면서도 부드러운, 그 추억은 항상 연습하던 그림처럼 눈앞에 그려진다.


겨울이 왔다.  




///




다들 이런 사연이 하나 쯤 있으시지 않은가요? 

평소엔 이렇다 저렇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도 가슴아린 추억을 가지고 있는거죠. 모르는 척, 그러다가 갑자기 스치듯 떠오르는 첫사랑. 

그걸 추억하며 피우는 담배의 첫맛은 달콤하고, 차가운 바람에 꺼져버린 담뱃불에 그 달콤함은 다시 불을 지피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남을 것입니다.(공익광고협희회)

크흠, 누구나 짝사랑에 대한 추억이 있을겁니다. 그것이 비록 바라만 본 것이라도 그 사람과의 잠깐 마주친 눈동자에 자신이 비추어진걸 추억해본다면 감회가 새롭지 않을까 싶네요. 

이건 제 이야기지만 댓글에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은 작음 바램이 있네요. 

왜냐면..저만 쓰면 부끄럽잖아요!!



이 글은 제가 작년(2016년)에 학교에서 국어 선생님이 '고3 이과생이라도 글쓰는 것도 한 번 쯤은 해봐야지' 라면서 자기가 겪은 일중에 기억에 남는 거 쓰시라길래 썻던 것입니다.(참고로 기간은 1~2학기 전체입니다. ) 낸 거랑은 다르게 수정도 많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아서 아, 세상엔 이런 스토리를 가진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씁니다! 


ps. 참고로 저 여자애는 동갑입니다. 사정으로 인해서 학교를 1년 쉬었다고해요. 그래서 1학년 후배..그러나 나이는 동갑인..불편한 관계.. 지금도 존댓말 하구요. 지금은 학교 열심히 다니면서 고3이 될 준비를 하고있다네요 ㅎ 뭐, 밑에 층이라서 가끔 보지만요. 귀염귀염 ㅎ



다들 즐거운 설연휴되세요~


(제가 직접 쓴 글이다보니까. 오타지적은 정말 눈뜨고 못보겠다 싶은 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한글로 쳤는데 몇 개는 고쳐도 빨간줄이 뜨더라구요. 제가 몰라서 그런 것이니 말씀해주세요!)



감성 터진 새벽에 올리기ㅎ

젠장, 고백할까. 어차피 졸업인데..

고백해서 여친이 되어주면 좋겠지만- 

마음대로 그럴수 없는 게 현실이겠죠.